TBS –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서해성의 박학다설] 한강다리 100년, 노들섬은 섬이 아니었다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서해성의 박학다설] 한강다리 100년, 노들섬은 섬이 아니었다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7. 10. 20. (금) 18:00~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 김종배 : 우리시대의 지식광대입니다.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두 주 만에 뵙네요. 두 배로 반갑습니다.

▷ 서해성 : 이럴 때 정말 반갑다는 말이 느껴지네요.

▶ 김종배 : 잘 지내셨죠?

▷ 서해성 : 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저 없는 동안에 한강의 다리 이야기를 하셨다고, 100년?

▷ 서해성 : 그렇습니다. 1917년 10월 7일 오전 11시 12분 한강다리가 시작됐습니다.

▶ 김종배 : 도대체 날짜까지는 이해를 하겠어, 몇 시 몇 분까지는 어떻게 알아요?

▷ 서해성 : 이 방송에서 이 내용이 우리나라 사상 처음 공개되고 있는 중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사실 제가 여기 와서 얘기하는 내용들의 상당부분들이 제가 찾은 자료들이거나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이 박학다설을 너무 좋아하는 이유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으니까,

▷ 서해성 : 오늘 이야기의 9할 정도는 학문적으로도 검토가 안 된, 자료가 처음 찾는 내용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전문용어로 발굴특종,

▷ 서해성 : 특종까지는 아니고 지식인들은 그런 것을 찾아내야 된다고,

▶ 김종배 : 그냥 특종이라고 해요.

▷ 서해성 : 알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제가 지난주에 없었잖아요. 3분 복습을 해보시죠.

▷ 서해성 :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한강다리는 일본이 놨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꼭 생각하지 말아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한강다리 100년과 함께 애환을 같이 한 사람은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래 1900년에 놨던 경인철도 옆에 인도교를 놔달라는 것이 우리정부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인 모스가 그것을 놓지 않고 부설권을 일본에 팔아넘긴 것이죠. 그런데 일본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그 옆에 인도교계획은 애초에 고종이 세운 계획입니다. 그게 17년간 유예되었다. 한국인들이 한강에 다리를 놓을 정도의 생각을 못했던 사람은 결코 아니다.

▶ 김종배 : 그럼 자부심을 느껴도 되겠네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래 했던 계획이고 비용도 우리가 상당부분 지출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제1차 조선치도계획, 조선총독부의 도로를 놓는 계획이라는 말이죠. 그 일환으로 진행되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총독부의 토목국장, 요즘말로 하면 건설부장관입니다. 그 사람이 남긴 기록에 보면, 당일 날 인터뷰입니다. 일본신문에 남긴 기록을 보면, 당연히 일본신문을 찾은 겁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놓은 1,200리 길은 구한국정부, 이런 말 쓰면 안 되는데 일본말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우리는 그냥 대한제국시대라고 해야죠.

▶ 김종배 : 일본언론 표현이라는 것 확인하면서 들어주시죠.

▷ 서해성 : 구한국정부에서 200리를 놓았던 것 위에 길을 놓았다.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이야기냐면 원래 대한제국정부가 천리 정도에 해당하는 국토를 종단하는 도로 건설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인의 건설부장관의 말속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국사시간 때 배운 게 뭐냐면 경부선, 경인선 전부 일본이 놓았고 식민지근대화론자들, 보수를 바치고 있다고 하는, 이 사람들이 일본이 철도를 놓고 뭐해서 자본주의가 진척이 되었네, 뭐 했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 서해성 : 아주 크게 틀린 말입니다. 한 예를 말씀드리면 대한제국이 과연 근대화될 수 있었냐는 상징적인 이야기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성, 서울이죠. 나중에 일본에서는 게이조, 경성이라고 부르기는 했습니다만 한양시절에 우리가 동경보다 전차를 3년 먼저 놨습니다. 우리 스스로 근대화할 능력이 없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자기비하하지 맙시다. 지금도 이것도 대한제국의 구상, 플랜이 있었던 거잖아요.

▷ 서해성 : 애초에 플랜이 있었던 것에 일본이 다른 목적들을 추가했던 것이죠.

▶ 김종배 : 그러니까 족발보쌈만 원조가 있는 게 아니라 다리도 원조는 우리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원래 기획을 가졌던 것이고 원래 경인선 철도를 놓을 때부터 인도교를 만들려고 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도리어 일본이 17년간 유예시켰고 마치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양 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년을 되짚어본다고 그래서 혹시라도 일본이 한 것을 기리거나 기념하려고 하는 의도는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김종배 : 오리지널 우리 역사다, 이 점을 확인하면서 그러면 오늘은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봅니까?

▷ 서해성 : 사실 그때 지난주에 공사 얘기를 못 했거든요. 공사를 누가 했는지 굉장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한강이 교각, 석재교각이지 않습니까? 돌로 쌓아서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상판은 아니지만, 상판은 트러스트교입니다. 그때 했을 때 중국인 인부들 30명이 11개월 동안 일했다는 기록이 총독부 공사일지에 남아있습니다.

▶ 김종배 : 다리 쌓아올리는데?

▷ 서해성 : 네, 밑에 교각을 쌓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중국으로 돌아갔겠죠. 내지는 여기서 중국집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분들에 대한 기억도 같이 해야 되겠다는 말씀을 먼저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요. 이 공사를 했던 회사는 하자마구미라고 하는 회사입니다. 지금 이 회사가 남아있습니다. 안도라는 회사로 현재도 일본에서 큰 토목건축회사입니다. 하자마구미 경성지점에서 공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전형적인 식민지 토목자본입니다.

▶ 김종배 : 무슨 말씀이세요?

▷ 서해성 :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제일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 김종배 : 식민지 침탈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도로 닦고, 이런 작업을 했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이 부산 항만철도를 먼저 건설했고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강철교도 이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철교도 만들었습니다. 수풍댐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런 큰 프로젝트에는 한국기업이 단 한 개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 김종배 : 우리가 예를 들어서 돈이 없고 기술력이 없어서 아예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는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건설을 가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게 일본 식민지근대론자들이 ‘일본이 만든 건물들이 오래 가더라’ 맞는 말입니다.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천년, 3천년된 피라미드가 오래 남는 이유는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에 물리적인 기반을 허물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 김종배 : 더 기초를 탄탄히 하고,

▷ 서해성 : 바닥 면적이 넓고 위로 좁아지는 각도가 예각이 아닌 거죠. 그러니까 오래 가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그것이 고도의 테크닉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 김종배 : 서해성 작가님하고 얘기하다 종종 발견되는 게 진리라는 것은 단순하다.

▷ 서해성 : 단순하죠. 이 식민지, 하자마구미 같은 이 사람 중에 중요한 사람 한 사람을 꼽고 싶은데요. 수풍댐을 만들었던 회사가 조선수전, 조선수력발전소, 그 말이죠. 그 회사를 가지고 있었던 노구치 시타가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그 당시 한국에 얼마만큼 자본을 가지고 있었냐면요. 이 한 회사가 조선 산업자본의 4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김종배 : 진짜요? 그렇게 40%를 가지고 있었다고요?

▷ 서해성 : 네. 무슨 이야기냐면 이 사람이 띄워낸 것도 있겠지만 저희가 말씀드리는 것은 한국인은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일본인 일개 기업이 한국인 전체 인프라 40% 공사를 했고 그 자본을 다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 김종배 : 혼자 다 먹었다는 얘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그러니까 한국인이 발전할 수 없는 거죠. 이러면서 식민지 근대화시켰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죠. 그 기획자는 누구였냐면 구보타 유타카라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 이름 굳이 얘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해방이 된 뒤에 노구치라는 회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죽었고요, 43년도에. 구보타라는 사람은 살아있었어요. 90년대까지 살아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뭘 했냐면 해방이 된 뒤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팔당댐을 제외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지었던 20개의 발전소 전부 다를 이 사람이 기획하고 설계하고 감리했습니다.

▶ 김종배 : 싹쓸이했네?

▷ 서해성 : 네. 해방이 된 뒤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 김종배 : 너무 심한 것 아니에요? 다시 한 번 확인하는데 국내자본의 기술력이 없어서는 아니라는 거잖아요. 해방 뒤에도 이랬다고요?

▷ 서해성 : 네.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청와대에서 만나서, 회고록에 나와요, 일본어로 된 회고록. 만나서 이런 얘기를 부탁을 받았다는 거예요.

▶ 김종배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면 국내자본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발주를 국내자본한테 줘야지 무슨 소리하는 거야.

▷ 서해성 : 시공은 우리가 했죠. 설계, 감리, 이런 걸 다 일본인이 했던 거죠.

▶ 김종배 : 하청만 했다?

▷ 서해성 : 네. 그런데 그 사람이 일제 때도 했고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가 개발시대에도 일본인이 기획, 설계, 감리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구보타라는 사람이고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이 사람이 늘 자부했어요.

▶ 김종배 : 뭐라고요?

▷ 서해성 : 한국 내가 만들었다.

▶ 김종배 : 갑자기 혈압이 조금씩 오르네.

▷ 서해성 : 건축역사에 대해서는 한 번도 사실 토목이나 건축역사를 얘기해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언제 한 번 이 방송에서 얘기하겠습니다. 도대체 한국 누가 만들었나? 그리고 해방이 된 뒤에도 차라리 솔직히 말하자면 미국에서 데려오거나 프랑스에서 데려오지 하필이면 일본사람을 데려와서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 김종배 : 제가 중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모범생이었거든요. 성실히 학교수업에 임했던 학생의 입장에서 토목의 역사는 경부선, 경인선은 일제가 만들었다, 이 정도.

▷ 서해성 :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팔당을 뺀 나머지의 수력발전소를 다 일본이 건설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끔 남한강, 북한강을 지나가보시기를, 그렇게 하면 속이 상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 회사 건물이 남아있습니다, 용산에.

▶ 김종배 : 용산 어디에?

▷ 서해성 : 용산 우체국 뒤쪽에 가면 골목에, 지금 그 회사 이름을 공개할 수 없어서 그렇긴 합니다만 하자마구미 건물이 용산 뒤쪽에 현재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일본식건물 그대로 있고요. 저로서는 말하자면 부끄러운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으면, 좋은 것만 자꾸 지정하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답사도 가보고,

▶ 김종배 : 치욕의 역사도 보존을 해야죠.

▷ 서해성 :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을 서울시나 용산구청에 요청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때 이미 설계를 했을 적에 노량진에 있는 치수장에서부터 서울로 수돗물을 공급하도록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아무튼 다리 이야기 시작했으니까 다리가 지나가는 곳에 뭐가 있냐면 노들섬이 있지 않습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노들섬이라는 말은 90년대 생긴 말이고요.

▶ 김종배 : 1890년 얘기하는 겁니까? 1990년,

▷ 서해성 : 1990년대 얘기하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럼 그전에는 뭐라고 불렀어요?

▷ 서해성 : 그전에는 중지도라고 불렀죠.

▶ 김종배 : 중지도가 무슨 뜻이에요?

▷ 서해성 : 일본말입니다.

▶ 김종배 : 이것도?

▷ 서해성 : 네. 일본이 1917년에 이 이름을 붙였죠. 노들섬은 섬이 아니었습니다.

▶ 김종배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 서해성 : 오늘 그 얘기를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한강다리를 놓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실 이 지점,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이 지점이 정조가 건너갔던 그 길과 일치합니다.

▶ 김종배 : 정조 대왕이요? 어떻게 지나가요? 그때 다리 없었잖아.

▷ 서해성 : 그때 주교를 놨죠, 배다리.

▶ 김종배 : 아, 배다리.

▷ 서해성 :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 김종배 : 주교라는 게 배를 나란히 해서 상판 까는 것 얘기하는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최대 800척의 배를 밑에 놓고 위에 송판을 깔아서 건너가는 거였거든요.

▶ 김종배 : 정조 대왕 그렇게 건넜어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래서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한강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몇 달 동안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 김종배 : 말 그대로 한강에서 배 띄워서 고기 잡던 배라는 배는 전부 다 차출했겠네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욕먹을 만했네.

▷ 서해성 : 왜 정확하게 알 수 있냐면 현재 노량진1동이 과거 주교사가 있던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한강다리 끝 지점이 바로 그 노량진1동 동사무소가 있거든요, 주민센터. 주교사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이어졌다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가 용왕봉저정이라고 하는 정자가 있는데 정조 대왕이 거기서 점심을 드시고 갔다는 자리거든요. 정확하게 그 자리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아무튼 모르는 게 없어.

▷ 서해성 : 만약에, 그냥 일본식 표현으로 쓰겠습니다. 중지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일본이 다리 놓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중지도가 무슨, 중이 가운데 중이에요?

▷ 서해성 : 가운데 중에, 갈 지자에, 섬 도자인데요. 일본에서는 어떤 걸 얘기하느냐면 이 말도 일본어입니다. 하중도, 하천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겁니다. 일본에서 이건 보통명사입니다. 대표적인 중지도가 어디 있냐면 오사카에 있습니다.

▶ 김종배 : 일본에도 중지도라는 게 있어요?

▷ 서해성 : 중지도가 수십 개 있겠죠.

▶ 김종배 :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다?

▷ 서해성 : 네, 일반명사입니다. 일본에서 쓰는 말을 우리가 그대로 가져온 거죠. 일반명사를 우리 고유명사로 쓴 게 많습니다. 그것보다 더 슬픈 건 해방된 뒤에 우리가 붙인 일본식 이름이죠. 대표적인 게 윤중로죠.

▶ 김종배 : 그것도 일본식이에요?

▷ 서해성 : 일본말입니다. 윤중로가 뭐냐면 둑을 쌓았는데 그 위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말하는 겁니다. 윤중로라는 말은 일본에서 보통명사에요.

▶ 김종배 : 얘기 들어보니까 지명에 대한 일제의 잔재도 한 번 해야겠다.

▷ 서해성 : 그러면 방송 한 1년 가까이 해야 되는,

▶ 김종배 : 좋아요. 우리 동네 이야기인데 일본이 붙인 이름이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 서해성 : 윤중로에 벚꽃을 심었으니까 일본인들이 참 좋아하겠죠.

▶ 김종배 : 노들섬 이야기 좀 더해 주세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 서해성 : 노들섬이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용산 쪽에서 188m의 다리거든요. 그 당시 중지도를 지나서 400m 다리거든요. 그게 있었기 때문에 전장으로 보면 1,000m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노들섬이라고 하는 다리에 걸쳤기 때문에 훨씬 더 안전하게, 사실은 다리를 두 개 건설한 거죠.

▶ 김종배 : 조금 더 쉬웠겠지.

▷ 서해성 : 이루 말할 수 없이 쉬웠죠. 그러니까 우리가 건널 때 보면 1km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 김종배 : 원래 섬이 아니었다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 서해성 : 원래 한강 백사장이었습니다.

▶ 김종배 : 백사장이었다고요?

▷ 서해성 : 네. 지난 방송에도 잠깐 얘기했습니다만 신익희 후보가 했던 유명한 한강 백사장연설이 여기에서 했던 겁니다.

▶ 김종배 : 그거 알아요. 그게 여기에요?

▷ 서해성 : 여기입니다. 지금 왜 이게 없어졌냐면 거기 있는 한 20만평 정도를 백사장을 매입해서 현재 동부이촌동, 서부이촌동이 생깁니다.

▶ 김종배 : 깔고 아파트 세운 거예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백사장이 그렇게 컸어요?

▷ 서해성 : 그렇게 컸죠. 그러니까 그 당시 우리나라 이른바 광장정치의 시작이지 않습니까? 56년도 광장정치의 시작이, 20만 명이 거기 들어갈 수 있었던 거죠. 거기가 거대한 유원지였죠, 여름에는.

▶ 김종배 : 저는 속으로 한강 백사장 그래서 강변에 백사장 해봤자,

▷ 서해성 : 엄청 넓었습니다. 그리고 용산에서부터 지금 노들섬까지는 강이 아니라 백사장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물이 들어오는,

▶ 김종배 : 그렇죠. 비 많이 오고 이러면 물 흐르고,

▷ 서해성 : 박정희 정권 68년도부터 있었던 제1차 한강종합개발계획,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 이어진 제2차 한강종합계획에 의해서 그 일대의 모래를 파냅니다. 파내서 강남을 짓는데 그 모래를 씁니다. 그래서 그 물이 들어오게 된 거예요. 이해가시죠, 무슨 이야기인지?

▶ 김종배 : 4대강 사업에서 모래 파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한강 백사장 모래 파내서 했다는 이야기는,

▷ 서해성 : 4대강 사업을 할 때, 그 사람 이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양반이 이런 데에서 배운 거죠.

▶ 김종배 : 원조는 여기군요.

▷ 서해성 : 네. 파내서 쓴 거죠. 써서 비게 되니까 물이 들어오게 된 거죠.

▶ 김종배 : 팩트 체크 하나 해야 되는 게 한강 백사장모래를 팔았잖아요. 판 주체는 정부입니까? 정부가 돈 받고 판 겁니까?

▷ 서해성 : 정부가 팔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섬도 팔았습니다. 그 당시에 중지도 자체를 기업에 팔았습니다.

▶ 김종배 : 어느 기업에요?

▷ 서해성 : 기업 얘기까지 해야 되겠습니까?

▶ 김종배 : 그럴 필요는 없는데,

▷ 서해성 : 아무튼 서울시가 다시 매입하게 되는 겁니다.

▶ 김종배 : 기업은 몇 배 장사했대요?

▷ 서해성 : 그건 기업에 여쭤봐야겠죠. 노들섬이 원래 있었던 게 아니라 용산에도 둔덕이 있었고 한강 쪽에도 둔덕이 하나 있었던 거죠. 둔덕을 남긴 채로 나머지 모래를 다 긁어쓴 거죠.

▶ 김종배 : 그러면 그 주변에 마을도 있을 거고 주민들도 있을 거고,

▷ 서해성 : 마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요. 원래 조선시대의 기록에 보면 그 지역은 신초리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쇠 신자에 풀 초자가 돋는, 신초리라는 마을이었는데,

▶ 김종배 : 강변에 수풀이 우거지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이 기록을 제가 처음 찾아본 건데 왜냐하면 노들섬에 관한 자료를 여러 사람들이 찾았는데 대개 일제 때 기록이 있다고 하지 조선시대 기록이 있다는 건, 오늘 아마 이 방송에 처음 공개되는,

▶ 김종배 : 조선시대 기록을 찾으셨구나?

▷ 서해성 : 처음 공개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때의 기록으로 보면 비변사등록에 숙종 9년 1683년에 신초리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이 나와 있었습니다. 이지화라고 하는 군인이 있었는데 배 5척을 만들라고 했더니 일을 열심히 해서 배 6척을 추가로 만들고 나룻배도 2척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상을 주자하는데 이 사람 근무지가 어디냐면 신초리에요. 무슨 얘기냐면 밤섬처럼 신초리도 농사를 짓고 배도 만들고 물고기도 잡고 하는 큰 고을이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 김종배 : 쉽게 말하면 조그만 조선소가 있었다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한국인이 굉장히 많이 살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1895년도, 갑오경장 이후에 기록이 나와 있기를 정부에 이 사람들이 우리 토지를 잘 관리해 달라. 무슨 얘기냐면 누군가가 세금을 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정부에서 직접 우리를 관리해 달라 요청을 낸 서류를 제가 확보했습니다. 그것으로 봤을 적에도 상당히 넓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용산에서부터 노들섬으로 이어지는 그게 수백 미터인데 그 전체가 상당부분 마을이 있었고 그 속에서는 들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 김종배 : 그러면 다리를 놓느라고 다 밀어버렸을 것 아닙니까? 다 쫓아낸 거예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 얘기가 진짜 재미있는 얘기인데요. 이 얘기를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면 일본이 1910년, 11년이 되면 치도계획을 세웁니다. 도로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애초부터 한강을 다리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신초리 사람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죠. 신초리 사람만 모르는 거죠. 그렇게 된 건데 이 기록들이 처음 공개되는 건데요. 1913년에 신초리 사람 중에 이장 김윤석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 이름을 꼭 얘기하고 싶습니다.

▶ 김종배 : 김윤석, 지금 영화배우 이름하고 똑같네.

▷ 서해성 : 그렇군요. 그때 이분이 소송을 제기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시민운동입니다. 소송을 제기하는데 그때 성인남자 86명의 이름을 연서명해서 소송을 제기합니다.

▶ 김종배 : 집단소송,

▷ 서해성 : 80년대 변호사들이 처음 한 게 아니고 이분들이 처음 소송을 제기하는 겁니다.

▶ 김종배 : 주거권 보장하라, 이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 당시에 후작 이해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완용이 백작이었으니까 후작이면,

▶ 김종배 : 친일매국노 한 명 또 나오네.

▷ 서해성 : 홍종호의 사위입니다, 이 사람이. 이해창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초리 땅 전체를 일본에게 팔아넘겼다는 겁니다.

▶ 김종배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사기사건 아니야?

▷ 서해성 : 사기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항의하는 소송을 제기를 합니다. 성인남자 86명이 서명했다고 한다면 곱하기 4를 하면 대략 300, 400명이 살았다는 얘기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러니까 최소한 86명이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고 경작하던 땅을 이 친일매국노가 싹 해서 팔아넘겼으면 그 땅 넓이가 얼마겠어요?

▷ 서해성 : 바로 그 얘기입니다. 그러면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집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 김종배 : 소송에서는 진 거죠?

▷ 서해성 : 소송에서 졌죠. 마저 말씀을 드리면 이 사람들이 강력하게 저항을 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생계의 터전을 뺏겼는데,

▷ 서해성 : 집단소송을 감행했고 다른 걸로도 이해창하고 여러 가지로 싸우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그 소송문서에 보면 신초리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되어 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두 개의 마을이 적어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이해창은 왕족입니다. 왕족이라는 자가 이렇게 했는데 문제는 일본한테 팔아넘기니까 일본인들이 총을 가지고 들어와서 신초리 사람들을 몰아냅니다. 용역이 들어온 거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비교가 좋았어요. 그렇죠. 요즘 용역은 몽둥이 들고 들어오고 옛날에는 총 들고 들어오고,

▷ 서해성 :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신초리 사람들만 몰랐고 실제로 신초리는 애초부터 개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일본이 직접 매입하면 욕을 먹으니까 한국인 친일파를 내세워서 그 땅을 파는 형식을 취했고 일본 조폭을 시켜서 신초리 사람들을 쫓아낸 다음에 1917년에 일본이 다리를 놓았다. 이렇게 생각해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친일파는 아무리 해도 좋게 봐줄 수 없는 게 별짓거리를 다한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속상한 얘기를 하자면 1917년 10월 7일 날 한강다리 인도교를 개통할 때 축사를 이완용이 했으니까요.

▶ 김종배 : 아무튼 그러면 지금 우리가 거기를 지날 때 여기에 피눈물이 묻어있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비변사등록으로 보면 마을이 거기 있었던 게 최소 200년, 그분들이 다 쫓겨났다고 하는 것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 생각을 같이 가지면서 한강을 언젠가 한 번은 건너가셨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여러분 꼭 건너실 때 그 생각을 해주시길 바라고, 그럼 백사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건 언제에요?

▷ 서해성 : 완전히 감춘 건 전두환 정권 때,

▶ 김종배 : 그때 이른바 지금은 둔치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고수부지,

▷ 서해성 : 고수부지도 일본말입니다.

▶ 김종배 : 맞아. 그 얘기는 들은 것 같아. 사업하면서 없애버린 거죠? 기억이 납니다.

▷ 서해성 : 그때 섬을 팔아넘겼고요. 팔아넘긴 10, 20년 지난 뒤에 서울시가 다시 매입해서,

▶ 김종배 : 노들섬에 사람 살았을 것 아니에요?

▷ 서해성 : 주로 사람이 노들섬에 살았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 김종배 : 다리 얘기하다보니까 친일파로 또 연결이 되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2005년도에 서울시에서 매입한 걸로 기록에는 나와 있습니다. 오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많았는데 사실 다리가 두 번 끊어졌지 않습니까?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면,

▶ 김종배 : 저는 한 번밖에 기억 못하는데 한국전쟁, 또 한 번은 언제에요?

▷ 서해성 : 1925년도 을축 대홍수 때, 을축년에 있었던,

▶ 김종배 : 홍수 때 끊어졌어요?

▷ 서해성 : 다리가 한강 용산 쪽으로 있었던 다리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복구를 다시 했고요. 그것을 복구하고 나서 다시 한 번 한강다리를 만드는데 38년도에 완성된 게 오늘날과 같은 아치교 형태가 되었던 것이고요. 그전까지만 해도 트러스트교였습니다. 그런데 양쪽이 아치교로 바뀌었던 것이고요. 그리고 한국전쟁 때 끊어졌죠.

▶ 김종배 : 그때 건 언제 이어진 거예요?

▷ 서해성 : 한국전쟁에 끊어진 게 58년도에 연결되었습니다.

▶ 김종배 : 그때까지는 연결을 안 했던 거예요?

▷ 서해성 : 연결을 안하고 그 위에 임시로 상판을 깔아서 지나다녔습니다. 완전복구된 건 58년도입니다.

▶ 김종배 : 꽤 오래 걸렸네요.

▷ 서해성 : 그렇죠. 50년도에도 복구가 되긴 했는데 그때는 미군이 설치한 부교를 이용해서 사람들이 건너다녔습니다.

▶ 김종배 : 네. 어떤 건지 대충 기억이 나네요.

▷ 서해성 : 사진에도 많이 나와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한강다리가 우리 스스로 끊었던 참 비참한 일이다, 그 대목을 짚지 않을 수 없죠.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때 다리를 끊었던 책임자는 공병감이었던 육군, 최창식 대령이었습니다. 지시를 받아서 끊었죠, 당연히. 그런데 그걸로 인해서 사형을 당했죠. 처음에는 끊으라고 해놓고 비난이 몰아치니까,

▶ 김종배 : 그때 대통령 이승만 자기는 도망가면서,

▷ 서해성 : 그랬죠. 한강다리를 끊으라고 해서 끊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부인이 소송을 해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 김종배 : 사형집행이 됐어요?

▷ 서해성 : 집행이 됐죠.

▶ 김종배 : 나중에 무죄판결 받았다 하더라도 돌아가신 다음 아니에요?

▷ 서해성 : 그것도 단심제. 전시군사법정의 단심제입니다. 재판기록이 현재 남아있습니다. 참 한강다리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김종배 : 이 방송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건축기법이나 이런 것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잖아요. 결국 말씀 듣다보니까 한강다리에 한마디로 얘기하면 피눈물이 서려있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우선 조선시대에 살고 있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본인에 의해서 쫓겨났다는 것 한 가지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요. 그리고 한강다리가 생기자 살림살이가 힘들었던 특히 여성들이 한강다리에서 투신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 김종배 : 한강다리에서 투신자살한?

▷ 서해성 : 네. 그런 일도 있었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폭파가 되어서, 사실 지금까지도 진상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확하게 몇 명이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 김종배 : 피난을 막은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당시 인구가 140만이었는데 그날 거의 대부분 아직 피난을 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그것 때문에,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한강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강을 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게 뭐냐면 원래대로면 ‘우리가 너네를 못 데리고 가서 미안하구나’ 정부가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되는, 부역자로 몰리게 되는, 그래서 서울시민이 도륙되었고요. 그래서 51년도 1.4 후퇴 때는 서울의 개 몇 마리만 남고 홈리스까지 다 떠났습니다.

▶ 김종배 : 또 몰릴까봐.

▷ 서해성 : 중공군이 여길 내려왔는데 서울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이유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 김종배 : 자연스럽게 청야전술이 되어버렸네.

▷ 서해성 : 청야작전이라고 군사용어로는 그렇긴 합니다만 작전이 아니었고 시민들이 알아서 다 떠났던 거죠.

▶ 김종배 : 결국은 민초의 애환이 다리에 새겨져있네요.

▷ 서해성 : 한강다리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한국인의 슬픔과 눈물이 같이 묻어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그때는 강수욕이라고 해서 강에서 해수욕하는 걸 말하는 거죠. 한강에서 강수욕이 유행했던,

▶ 김종배 : 백사장이 그렇게 있으면 충분히 되고,

▷ 서해성 : 수만 장의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친근한 한강이 사라진 겁니다. 그리고 신익희가 했던 한강백사장의 유명한 유세를 이런 것들도 사라졌고 참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재미있는 얘기로 마무리하고 싶은데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 한강에 있는 여러 섬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분들이 나쁜 의도였다기보다 한강에는 이것 말고도 섬이 많았습니다.

▶ 김종배 : 밤섬,

▷ 서해성 : 잠실 쪽에도 섬이 많았습니다. 그 섬들이 다 사라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섬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진짜?

▷ 서해성 : 물속에,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데 퇴적이 되면서 현재 섬들이 솟아나고 있는 구조입니다. 밤섬도 커지고 있습니다. 자연이 갖고 있는 위대한 힘을 보게 됩니다.

▶ 김종배 : 자연복원력인가?

▷ 서해성 : 자연이 갖고 있는 복원력입니다. 그런 것처럼 한강이 시민들에게 조금 더 생활 속에 추억이 어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한강다리 100년이 되었는데 한강박물관, 이런 것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결국 우리 할아버지 때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게 한강다리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지나다닐 때마다 한 번씩이라도 떠올려주시라는 말씀드리면서 박학다설은 마무리하겠습니다. 서해성 작가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2017.10.20

이전글

국민일보 – [한마당-고승욱] 노들섬

다음글

뉴스토마토 – (시론)한강 노들섬에 건국 100주년 기념물을